1.2 체험권 개봉과 설치의 불안
사전 등록을 마치고 나서 며칠 후, 김명호의 원룸 현관 앞에는 작은 택배 상자가 놓여 있었다. 겉면에는 ‘천하제일거상 VR’이라는 로고가 인쇄된 흰색 비닐 포장이 느슨하게 감싸져 있었다. 손이 떨렸다. “진짜 시작되는 건가…” 그는 상자를 집어 들고 현관 문을 닫았다. 포장지 겉면에는 ‘체험권 동봉 및 VR 기기 업그레이드 안내’라는 짤막한 문구만이 적혀 있었다.
거실 탁자 위에 상자를 내려놓고 종이 테이프를 조심스럽게 뜯었다. 속이 보이는 얇은 비닐 안에는 두툼한 매뉴얼 책자와 검정 천 케이스가 들어 있었다. 케이스를 열자 마치 은빛 갑옷처럼 반짝이는 VR 헤드셋, 그리고 손목에 착용하는 인터랙션 글러브가 두 개 놓여 있었다. 묵직하면서도 정교해 보이는 기기들은 지금까지 그가 다뤄본 어떤 전자기기와도 달랐다.
매뉴얼을 펼치니 설치 과정이 그림과 함께 차근차근 설명되어 있었다. 컴퓨터 사양 확인부터 드라이버 설치, 전용 포트 연결, 소프트웨어 실행 순서까지 12단계가 촘촘히 나열되어 있었다. 하지만 내용이 자세할수록 그의 불안감은 커졌다. “내 컴퓨터가 이걸 감당할 수 있을까?”
먼저 컴퓨터를 켜고 시스템 정보를 확인했다. CPU는 6세대 쿼드코어, RAM 8GB, 그래픽 카드는 4년 전 중급형 모델이었다. 요구 사항은 최소 CPU i7, RAM 16GB, RTX 2070 이상. 사양 차이가 큰 만큼 설치 불가 메시지가 뜨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매뉴얼 어디에도 ‘권장 사양 미달 시 호환 여부 보장 불가’ 따위의 문구는 없었다. “일단 해보자.”
USB 포트에 동봉된 드라이버 디스크를 넣어 설치를 시도했다. 삑-삑- 하는 광디스크 드라이브의 묵직한 소리가 더없이 오래 느껴졌다. 파일들이 복사되는 동안 창문 너머로는 이웃 아파트 불빛이 한 줄기 파도처럼 번졌다. 진행률 바가 100%에 가까워질 때쯤, 윈도우 보안 경고 창이 떴다. ‘이 출처가 확인되지 않은 드라이버를 설치하시겠습니까?’ 권장하지 않는다는 경고문이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래도 해야 한다…”
‘설치 계속’을 클릭하자, 관리자 권한이 필요한 또 다른 경고창이 떴다.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했다. 그는 머뭇거리며 키보드를 두드렸다. 비밀번호는 겨우 기억해냈지만, 손가락이 떨려 오타가 났다. 세 번의 시도 끝에 인증이 완료되었다. 땀이 식을 새도 없이,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소프트웨어 설치가 완료되자 화면이 자동으로 재부팅을 요청했다. “예”를 클릭하자 방 안 전체가 정전이라도 된 듯 정지했다. 모니터가 꺼지고, 컴퓨터가 재부팅되는 동안 그는 숨을 죽였다. 재부팅이 끝나고 드라이버 설치 화면이 사라지자, 매뉴얼에는 VR 기기 연결 순서가 표시되어 있었다.
검정 천 케이스를 꺼내 헤드셋 코드를 뒤로 제치고 USB-C 포트에 연결했다. 무게가 제법 있어 한 손으로는 버거웠으나, 천천히 머리에 밀착시키자 포근한 촉감이 느껴졌다. 이어서 글러브의 센서 노드를 손목에 맞추고 스트랩을 조였다. 손을 흔들자 글러브 센서가 반응했다는 초록 불이 반짝였다.
마지막으로 소프트웨어를 실행했다. 검은 화면 위에 작은 흰 글씨가 떴다. ‘VR 장치 감지 중…’ 로딩 아이콘이 빙글빙글 돌다가 멈추었다. 그 순간, 방 안 공기가 갑자기 차갑게 느껴졌다. ‘장치 확인 불가: 호환성 오류’라는 붉은 글씨가 화면 중앙에 떴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핸드폰으로 검색해본 수십 개 게시판과 세미나 기록을 떠올리며, 그는 매뉴얼 뒷면의 ‘고객 지원센터’ 연락처를 찾아냈다. 영어·한국어·중국어·일본어로 안내된 고객 지원 번호와 이메일이 적혀 있었다. 밤 11시가 넘어 있었지만, 확인할 수 있는 건 그 번호뿐이었다.
그는 전화를 걸었다. 통화 연결음이 10초, 20초, 30초째 반복되고 있었다. 결국 자동응답 시스템이 떴다. “고객님, 서비스 상담원이 연결되면 안내 도중에 끊지 마시고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라는 안내 멘트가 반복되었다. 그가 숨을 고르고 전화기를 귀에 대고 있을 때, 화면에선 ‘장치 드라이버 재설치 권장’ 팝업이 떠올랐다.
전화 연결이 지연되자 초조함이 증폭됐다. 그의 눈앞에는 무한 로딩 아이콘이 계속 맴돌고, 전화 연결음과 윈도우 팝업창이 교차하며 울렸다. 결국 그는 설치 키트를 내려놓고 책상 서랍을 뒤졌다. 과거 사무실에서 받았던 USB 메모리, 외장 하드, 네트워크 케이블 등 설렁설렁 모아둔 케이블 박스가 있었다.
“이걸로 한번 해볼까…”
새벽 1시를 넘긴 시간, 김명호는 다시 책상 위로 케이블과 보조 전원 어댑터, USB 허브를 내놓았다. 매뉴얼엔 없었지만, 혹시 부족한 전류나 연결 불량 문제일지도 모른다는 불확실성 속에서 그는 삽질을 시작했다. 써멀패드와 케이블 정리용 타이를 꺼내고, 천천히 헤드셋과 PC 사이를 재배치했다.
새벽 2시, 마침내 소프트웨어가 ‘장치 감지 완료’ 메시지를 띄우며 실행되었다. 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화면에 뜬 작은 창에는 ‘가상공간 입장 준비 완료’라는 문구가 보였다. 두 손이 떨렸지만, 그의 뇌리에는 다시금 설렘이 피어올랐다.
“드디어… 시작이야.”
그는 숨을 깊이 들이쉬고, 인터랙션 글러브의 트리거를 당겼다. 마치 오래된 문이 삐걱이며 열리듯, 그의 시야가 서서히 밝아지기 시작했다. 현실의 모든 불안과 고독은 일순간 잊혀진 채, 가상의 세상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