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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대상인1.1

by 백수PD 2025. 5. 18.

1.1 2030년 서울, 백수 김명호의 쓸쓸한 아침

새벽 6시 30분, 서울 도심의 빌딩 숲 사이로 희미한 가로등 빛이 어질어질하게 번졌다. 한겨울의 한기 대신, 봄을 재촉하는 서늘한 공기가 창문 사이로 스며들었다. 그러나 이 도시의 조용한 기운은 침묵보다는 무거운 적막에 가까웠다. 이 적막을 깬 것은 낡은 알람시계의 딸깍거리는 초침 소리와, 누구보다도 늦게 일어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자책의 목소리였다.

김명호, 마흔의 나이를 바라보는 그는 결코 대단하지 않은 이름이었지만, 이 작은 원룸에선 그의 존재가 유난히 크게 느껴졌다. 지난날 한때는 회사에서 프로젝트를 총괄하며 인정받았던 시절도 있었지만, 해고 통보를 받은 날부터 그의 시간은 멈췄다. 그날 이후 하루하루는 이전보다 길어졌고, 그 긴 시간 사이사이를 메워줄 무언가를 찾지 못해 방 안 공기는 점점 차가워졌다.

그는 이불을 걷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창틀 위에 놓인 오래된 스피커에서 먼지 쌓인 라디오가 켜졌다. "이제 곧 출근길 예상 교통상황을 전해드립니다..." 목소리는 친근했지만, 그에게는 남의 이야기처럼 들렸다. 신문 스크랩이나 라디오 한 귀퉁이에 귀 기울이는 것도 어느새 여유가 되어버린 백수의 일상이었다.

부엌으로 발걸음을 옮길 때, 작은 식탁 위에 놓인 청첩장이 그의 시선을 붙잡았다. 대학 시절 함께 밤새 과제를 하던 친구의 것이었지만, 막상 결혼식장 앞에 서 있을 자신은 없었다. 초대장을 꺼내 들고 한참을 바라보다 공허히 내려놓았다. 빈 의자 위엔 오래된 가방 하나와 낡은 재킷이 걸려 있었다. 자존심이라 믿었던 것마저, 이 공간에선 아무 의미 없었다.

아침 식사는 라면 한 봉지였다. 전기포트의 물 끓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지만, 그 소리조차 위로라 믿었다. 면을 삶고 스프 봉지를 뜯어 국물 위에 후드득 뿌리는 동작은 자동화된 기계의 조작처럼 무정했다. 젓가락으로 면발을 집어 올려 입으로 가져가는 순간, 그의 뇌리는 지난 직장 회식 자리의 웃음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그때도 이 국물을 들이키며 그렇게 살 것 같았는데.

“왜, 이렇게 된 거지...”

속삭이듯 터져 나온 한숨은 자신에게도, 이방에도 울림이 없었다. 주머니 속 스마트폰 알림은 모두 광고성 메시지 뿐이었다. ‘취업 찬스 5월 특집’, ‘취업 준비생 패키지 전원 제공’ 따위 제목이 스크린을 가득 채웠다. 그는 깊은 한숨을 몰아쉬며 화면을 껐다.

옷을 갈아입고 컴퓨터 앞에 앉자, 그의 컴퓨터는 느릿느릿 부팅을 시작했다. 언제 마지막으로 정상 부팅이 이뤄졌던가. 그사이 화면에 뜬 작업 표시줄 아이콘은 자신이 마지막으로 본 것이 무엇인지 기억조차 가물거렸다. 웹브라우저를 열었을 때 주소 표시줄에 손가락이 머뭇거렸다. ‘취업 포털’, ‘프리랜서 프로젝트’, ‘이직 성공 사례’... 지나치게 무수한 정보들 앞에서 그는 잔뜩 움츠러들었다.

무심결에 클릭한 한 뉴스 기사 제목이 낯설게 다가왔다. "VR MMORPG '천하제일거상 VR', 2030년 상반기 글로벌 출시 예정". 기사를 읽어 내려가자, 미래지향적인 포스터, 섬세하게 제작된 CG 이미지, 그리고 “과거 대작 ‘천하제일거상’의 정신을 계승한 경제 전략과 실시간 전투의 결합”이라는 문구가 눈에 박혔다. 무어라 규정할 수 없는 설렘이 그의 가슴 한켠을 파고들었다.

“한 번쯤... 가상에서라도 살아봐야 하나?”

머릿속으로 상상했다. 자신이 가상의 사막을 횡단하고, 해적섬에서 보물을 탈취하며, 도시를 오가며 거대한 상단을 이끄는 모습. 손끝에 땀이 맺혔다. 한때는 프로젝트 매니저로서 팀을 이끌었지만, 이젠 그 모든 게 잊혀졌다. 그러나 VR 속 세상에서는 다시금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사전 등록 페이지를 찾은 그는 이름, 나이, 희망 국적, 간단한 자기소개를 입력했다. “김명호, 40세, 새로운 도전을 꿈꾸는 모험가.” 클릭 한 번으로 남긴 이 기록은, 어쩌면 잃어버린 자존감을 되찾을 작은 시작일지도 몰랐다. 등록 버튼을 누르는 순간, 예상치 못한 전율이 전신을 감쌌다.

시계를 보니 오전 10시를 조금 지나 있었다. 오늘도 여느 때처럼 시간은 흘렀지만, 달라진 것은 그의 마음가짐이었다. 라면 봉지와 청첩장은 여전히 식탁 위에 있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방 안을 둘러보며 그는 결심했다. “이제 움직여야 해.”

바깥 공기가 답답하게 느껴지는 작은 원룸을 벗어나, 진짜 모험이 시작될 VR 세계를 향한 첫걸음을 내딛을 준비를 했다. 눌린 자존감과 좌절은 뒤로한 채, 김명호는 현실과 가상을 넘나드는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내려갈 용기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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